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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명(李頥命)[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1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문신(1658~1722). 자는 양숙(養叔)ㆍ지인(智仁). 호는 소재(疏齋). 벼슬은 대사헌, 병조 판서 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며 당대의 석학으로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문집 ≪소재집≫이 있다.

이이첨(李爾瞻)[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27 페이지 / 전적]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1560~1623).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ㆍ쌍리(雙里). 선조의 후사(後嗣) 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 판서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실각되었다.

이인거(李仁居)[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31 페이지 / 전적]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낸 이추(李樞)의 손자이다. 익찬(翊贊)을 지내고 강원도 횡성(橫城)에 거주하다가 1627년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이 나라를 그르친다는 명분으로 수백의 도당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다. 먼저 현감(縣監) 이탁남(李擢男)을 사로잡고 군기(軍器)를 빼앗아 스스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하고 서울로 침입하려다가 원주목사(原州牧使) 홍보(洪靌)에게 잡혀 서울에서 사형되었다.

이인복(李仁復)[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65 페이지 / 전적]

고려말의 문신(1308~ 1374)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극례(克禮), 호는 초은(樵隱)이다. 백이정(白頤正)에게 성리학을 배워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된 후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발탁되었다. 평생 성리학을 존숭하여 불교를 멀리했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문장을 짓는 데 말이 엄하고 뜻이 깊어 기롱하고 풍자하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인친척(里人親戚)[궁월가라 13 페이지 / 전적]

이웃과 친척.

이일간증(伊日間證)[구쟉가 9 페이지 / 전적]

이날 사이에 증명함.

이임보(李林甫)[녁대가(녁가) 58 페이지 / 전적]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승상. 현종의 후궁에게 잘 보임으로써 출세를 시작하여, 19년 동안 항상 현종 측근에 있으면서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左之右之) 했음. 아첨을 일삼고 유능한 관리들을 배척하여 당(唐)을 쇠퇴의 길로 이끈 인물로 여겨지고 있음.

이자(二字)[여자석별가 1 페이지 / 전적]

두 글자.

이자(二字)[여자석별가 2 페이지 / 전적]

주석 2번과 같음.

이자(移咨)[문청공연행일기(文淸公燕行日記) 27 페이지 / 전적]

자문(咨文, 중국과 왕복하는 공문서)을 보내거나 통보하는 것을 말함.

이자겸(李資謙)[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54 페이지 / 전적]

고려 시대의 척신(戚臣)(?~1126)으로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된 후 익성 공신(翼聖功臣)이 되고 인종이 즉위하자 셋째와 넷째 딸을 비로 삼게 하여 외척으로 권세와 부귀를 누리며 전횡을 일삼다가 척준경에게 쫓겨나 귀양 가서 죽었다.

이자등영(二子登榮)[이십사룡입수(二十四龍入首) 11 페이지 / 전적]

두 아들이 영화로운 벼슬에 오르다.

이자석에[회초가 3 페이지 / 두루마리]

이 자리에.

이작고인[상사곡이라 4 페이지 / 두루마리]

이작고인(已作故人). 이미 고인(故人)이 되다.

이장(移葬)[거사가 3 페이지 / 전적]

개장(改葬). 무덤을 옮기는 일.

이장군(李將軍)[석천집(石川集二-三)2-3 9 페이지 / 전적]

전국시대 때 조(趙)나라의 장수 이목(李牧)을 가리킨다. 이목은 북방의 흉노(匈奴)를 막아 흉노가 조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으며, 진(秦)나라도 크게 무찔러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진나라에서는 근심을 한 나머지 조왕의 폐신(嬖臣) 곽개금(郭開金)을 이용해 이목이 모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조왕(趙王)은 이목을 죽이게 되었고, 조나라는 진나라에게 망하게 되었다.

이재가(李在稼)[거창가 14 페이지 / 전적]

1837부터 1841년까지 거창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었음. 이재가(1783~1865)는 청백리의 후예로서 광능참봉으로 봉해졌다가 안주목사를 지냈으며, 80세 되던 임술년(1862)에는 조관(朝官)으로서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봉해졌음.

이재가(李在稼)[거창가 14 페이지 / 전적]

1837부터 1841년까지 거창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었음. 이재가(1783~1865)는 청백리의 후예로서 광능참봉으로 봉해졌다가 안주목사를 지냈으며, 80세 되던 임술년(1862)에는 조관(朝官)으로서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봉해졌음.

이재가(李在稼)[거창가라 18 페이지 / 전적]

정유년(헌종 3년, 1837)부터 신축년(헌종 7년, 1841)까지 거창 수령으로 재직했던 인물.이재가(1783~1865)는 청백리의 후예로서 광능참봉으로 봉해졌다가 안주목사를 지냈으며 80세 되던 임술년(1862)에는 조관(朝官)으로서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봉해졌다.

이재가(李在稼)[아림가(娥林歌) 19 페이지 / 전적]

정유년(헌종 3년, 1837)부터 신축년(헌종 7년, 1841)까지 거창 수령으로 재직했던 인물. 이재가(1783~1865)는 청백리의 후예로서 광능참봉으로 봉해졌다가 안주목사를 지냈으며 80세 되던 임술년(1862)에는 조관(朝官)으로서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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