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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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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7,094개

길흉수(吉凶水)[유소가 8 페이지 / 전적]

운이 좋고 나쁨.

길흉화복(吉凶禍福)[고분가 9 페이지 / 전적]

길흉과 화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

길흉화복(吉凶禍福)[고분가 9 페이지 / 전적]

길흉과 화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

김(金)둥이[노처녀가1(老處女歌 (一)) 5 페이지 / 전적]

김씨 성을 가진 사람. 이에 대한 가사 원문 표기는 ‘김동이’로 되어 있음. 상처(喪妻) : 상우(喪偶). 아내가 죽어서 혼자되는 것.

김가기[팔역가(八域歌) 37 페이지 / 전적]

신라 대 당나라 유학생

김강상[화전가1 15 페이지 /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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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상[화전가2 15 페이지 /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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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金開男)[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58 페이지 / 전적]

구한말의 동학 접주(1853~1895). 자는 기선(箕先)ㆍ기범(箕範). 전봉준 다음가는 남접(南接)의 지도자로, 한때 남원을 점거하여 동학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김건재[팔역가(八域歌) 39 페이지 / 전적]

의병장 김천일

김경서[팔역가(八域歌) 6 페이지 / 전적]

광해군 때 장수

김경손(金慶孫)[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58 페이지 / 전적]

고려 고종 때의 장군(?~1251)으로 정주(靜州)와 귀주(龜州) 등지에서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이연년 일당을 소탕하였다. 뒤에 최항의 시기로 백령도에 유배되어, 바다에 던져져서 죽었다.

김경징(金慶徵)[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33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문신(1589~1637). 자는 선응(善應).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도승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자,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로서 수비에 소홀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처형되었다.

김공량(金公諒)[문청공유사 사계수필(文淸公遺事 沙溪手筆) 18 페이지 / 전적]

선조 때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오빠. 누이가 세조의 총애를 받자 세도를 부려 선조24년(1591)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세자책봉 문제로 정철을 유배시켰다. 1592년 내수사별좌(內需司別坐)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의 항의로 처형명령이 내리자 강원도 지방으로 도피했다.

김공사적[팔역가(八域歌) 6 페이지 / 전적]

광해군 당시 김응하 장군의 사적

김굉필(金宏弼)[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03 페이지 / 전적]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1454~1504)로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형조(刑曹) 좌랑(佐郞)을 지냈고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저서에

김교리(金校理)[북쳔가 14 페이지 / 두루마리]

<북천가>의 저자 김진형을 이른다.

김교리(金校理)[북쳔가 20 페이지 / 두루마리]

교리(校理)란 조선 시대에,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 따위에 속하여 문한(文翰)의 일을 맡아보던 문관 벼슬을 이른다.교리는 정오품 또는 종오품이었다.

김구(金九)[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68 페이지 / 전적]

독립운동가ㆍ정치가(1876~1949). 자는 연상(蓮上). 호는 백범(白凡)ㆍ연하(蓮下). 본명은 창수(昌洙). 동학 농민 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하여 의병단에 가입하였고, 3ㆍ1 운동 후 중국 상하이(上海)의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8년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4년 임시 정부 주석으로 선임되었고, 8ㆍ15 광복 이후에는 신탁 통치와 남한 단독 총선을 반대하

김귀영(金貴榮)[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21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문신(1520~1593).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부제학, 대제학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적과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희천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숙종 때 신원(伸冤)되었다.

김규진(金奎鎭)[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50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 농민봉기 주도자이다. 1862년 4월 관기(官紀) 문란에 항거, 민폐를 없애라는 '읍폐교구(邑弊矯捄)’'의 통문을 돌려 읍민을 선동하다가, 현감 김후근(金厚根)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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