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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남풍시(南風詩)[거창가 2 페이지 / 전적]
순임금이 남훈전(南薰殿)에서 오현금을 타며 불렀다는 노래.
남풍시(南風詩)[만수가(만슈가) 15 페이지 / 두루마리]
중국 상고시대 순(舜)임금이 남훈전(南薰殿)에서 오현금을 타며 백성의 편안함 과 풍부한 살림을 읊은 시.
남풍시(南風詩)[해방후환히락가(방후환히락가) 7 페이지 / 두루마리]
중국 상고시대 순(舜)임금이 남훈전(南薰殿)에서 오현금을 타며 백성의 편안함 과 풍부한 살림을 읊은 시.
남풍시(南風詩)[조심가라 8 페이지 / 전적]
순임금이 정사에 힘을 기울이며, 백성들이 아무 걱정없이 잘 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지어 부른 노래의 제목으로 <남가시(南風歌)>라고도 함. 이 노래는 오현금(五絃琴)의 반주에 맞추어 불렀는데, 그 노랫말은 ‘남풍이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불평을 풀어 주고, 남풍이 때에 맞게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물을 넉넉하게 해주네(南風之薰兮 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임.
남풍시(南風詩)[권농가(권롱가) 1 페이지 / 두루마리]
중국 상고시대 순(舜)임금이 남훈전(南薰殿)에서 오현금을 타며 백성의 편안함 과 풍부한 살림을 읊은 시를 말한다.
남풍시(南風詩)[창덕가2 26 페이지 / 전적]
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주남편과 소남편을 가리킴.조화롭고 태평한 세상의 시를 비유하는 말.
남풍시(南風詩)[거창가라 9 페이지 / 전적]
순임금이 남훈전(南薰殿)에서 오현금을 타며 불렀다는 노래.
남풍시(南風詩)[아림가(娥林歌) 9 페이지 / 전적]
순임금이 남훈전(南薰殿)에서 오현금을 타며 불렀다는 노래.
남풍시(南風詩)[창덕가2 27 페이지 / 전적]
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주남편과 소남편을 가리킴.조화롭고 태평한 세상의 시를 비유하는 말.
남풍시절(南風詩節)[화조가 1 페이지 / 두루마리]
남풍시(南風詩)의 곡조. 남풍시(南風詩)는 순임금이 남훈대에서 오현금을 타며 백성의 평안함과 풍부함을 노래한 시.
남풍지훈(南風之薰)[월기달노래라(월기달노라) 3 페이지 / 두루마리]
순임금이 지은 노래의 이름.
남풍지훈(南風之薰)[월기달노래라(월기달노라) 3 페이지 / 두루마리]
순임금이 지은 노래의 이름.
남풍지훈혜 해오민지온혜(南風之薰兮 解吾民之慍兮)[사친가1(思親歌(一)) 4 페이지 / 전적]
중국 고대의 순(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가지고 불렀다는 <남풍시(南風詩)>의 일절임. ‘남풍의 따뜻함이여 우리 백성의 걱정을 풀어주리로다.’의 뜻.
남풍지훈혜(南風之薰兮)[녁대가(녁가) 13 페이지 / 전적]
순(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며 읊었던 노래인 <남풍가(南風歌)>의 첫 구절. 전문은 다음과 같음. “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남한산성(南漢山城)[한양가라 7 페이지 / 전적]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산성으로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45일 간 전쟁 끝에 청나라에 무릎꿇고 항복한 싸움터로 유명하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올라갈 제 박한남(朴漢男)의 등에 업혀 창망하게 달아날 제[한흥가라 66 페이지 / 전적]
박한남(1599년∼1655)은 병자호란 때 도총도사(都摠都事)를 제수 받아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다. 1643년(인조 21)에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제수하고 군병을 거느리고 청나라를 구원하러 가기도 하였다. 박한남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에 출생했기 때문에, 이 구절은 시기를 앞선 표현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박한남은 박숭원(朴崇元, 1532∼1593)을 말하는 듯하다. 박숭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선조로부터 보검(寶劍)을 하사받
남한산성(南漢山城) 올라갈 제 박한남(朴漢男)의 등에 업혀 창망하게 달아날 제[한흥가라 66 페이지 / 전적]
박한남(1599년∼1655)은 병자호란 때 도총도사(都摠都事)를 제수 받아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다. 1643년(인조 21)에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제수하고 군병을 거느리고 청나라를 구원하러 가기도 하였다. 박한남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에 출생했기 때문에, 이 구절은 시기를 앞선 표현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박한남은 박숭원(朴崇元, 1532∼1593)을 말하는 듯하다. 박숭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선조로부터 보검(寶劍)을 하사받
남한산성(南漢山城)올라갈 제 박한남(朴漢男)의 등에 업혀 창망하게 달아날 제[한흥가라 66 페이지 / 전적]
박한남(1599년∼1655)은 병자호란 때 도총도사(都摠都事)를 제수 받아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다. 1643년(인조 21)에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제수하고 군병을 거느리고 청나라를 구원하러 가기도 하였다. 박한남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에 출생했기 때문에, 이 구절은 시기를 앞선 표현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박한남은 박숭원(朴崇元, 1532∼1593)을 말하는 듯하다. 박숭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선조로부터 보검(寶劍)을 하사받
남항(南行)[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五)5 48 페이지 / 전적]
「南行」- 國朝의 官階가 文, 蔭, 武의 三班이 있어 武階는 西로 文秩은 東으로 蔭은 南으로 되었음.
남해(南海)[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二)2 13 페이지 / 전적]
「南海鵬」- 莊子 逍遙遊에「鵬之徙於南溟也 水聲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라 하였는데, 이 詩의 뜻은 莊子 齊物論의 「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泰山爲小 莫壽於殤子 而彭祖爲夭」란 말을빌려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