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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백량대(栢梁坮)[백발가 5 페이지 / 전적]
한 무제가 섬서성에 쌓은 누대.
백련 결사(白蓮結社)[권왕가 57 페이지 / 전적]
백련사(白蓮社). 중국 동진(東晋)의 혜원(慧遠)이 402년에 만든 염불 수행의 결사. 정토 신앙을 강조함. 결사(結社) : 앞에 든 각주 673 참조. 참례(參禮) : 예식에 참여하는 것.
백련에 의탁함[고봉선생문집 권일(高峰先生文集 券一) 192 페이지 / 전적]
《廬阜雜記》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편지도 도연명(陶淵明)을 부르니, 연명이 ‘나는 술을 좋아하니 술을 마시게 하면 갈 수 있다.‘ 하자, 혜원이 허락했다.‘는 고사가 있다.
백련화(白蓮花)[관동별곡 16 페이지 / 전적]
흰 연꽃. 달의 다른 이름.
백령(白靈)[베틀가라 2 페이지 / 전적]
백령(百靈)의 잘못된 표기로 보이며, 모든 백성을 뜻한다.
백로(白露) 추분(秋分)[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20 페이지 / 전적]
일년 24절후의 하나. 양력으로 9월 8일경임. 점차 가을다운 기운이 더해지는 때. 일년 24절후의 하나. 양력으로 9월 23일경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음.
백로상강(白露霜降)[가사소리 17 페이지 / 전적]
이십사절기의 하나.백로는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들며, 9월 8일경이고, 상강은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들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으로 10월 23일경.
백로시(白露時)[냥신낙사가(냥신낙가) 11 페이지 / 두루마리]
이십사절기의 하나.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들며, 9월 8일경.
백로시(白露時)[냥신낙사가(냥신낙가) 11 페이지 / 두루마리]
이십사절기의 하나.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들며, 9월 8일경.
백로지(白露紙)[형제붕우소회가라 5 페이지 / 두루마리]
갱지(更紙)를 속되게 부르는 말.
백록(白鹿)[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二)2 141 페이지 / 전적]
「白鹿」―宋 朱熹가 知南康軍이 되자, 南唐의 建學處인 白鹿洞에 書院을 重建하고 講學하였음. 여기는 退溪가 豊基郡守로 赴任하여 白雲洞 安文成公裕의 書院을 永久保存하기 위해 監司에게 글월을 올려 扁額에 대한 啓聞을 請한 사실이 있으므로, 朱子의 白鹿에 이유하여 쓴 것임.
백록(白鹿)[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七)7 118 페이지 / 전적]
朱子가 南康의 知軍으로 가서 白鹿洞에 書院을 建立하였음. 여기는 선생은 歿世하고 書院만 섰다는 뜻으로 쓴 것임.
백록(白鹿)[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七)7 121 페이지 / 전적]
白鹿洞書院을 빌려 筆岩書院의 火災를 말한 것임.
백록(白鹿)[월기달노래라(월기달노라) 6 페이지 / 두루마리]
흰 사슴.
백록(白鹿)[월기달노래라(월기달노라) 6 페이지 / 두루마리]
흰 사슴.
백록동[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一)1 103 페이지 / 전적]
「白鹿洞規」- 白鹿洞은 中國 江西 星子縣北 盧山 五孝峯 아래에 있는데, 唐 李渤이 그 형 李涉과 함께 盧山에서 讀書하면서白鹿 한 마리를 길러 노상 그 사슴이 뒤를 따르므로 洞의 이름이 된 것임. 宋나라 初에 書院을 이곳에 세웠다가 뒤에 폐했는데, 朱子가 南康을 맡게 되자 書院을 重建하고 講學하며 學規를 揭示하였음.
백록동(白鹿洞)[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三)3 61 페이지 / 전적]
「白鹿洞」― 上卷의 讀白鹿洞規에 자세히 나타나 있음.
백룡퇴(白龍堆)[북쳔가 6 페이지 / 두루마리]
중국 신강(新疆)에 있는 사막.
백륜[석천집(石川集二-二)2-2 100 페이지 / 전적]
백륜은 유령의 자이다. 자기가 술 마시다 죽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묻어 달라고 아이에게 부탁했다. 대본의 달(達)자가 목판본에는 칭(稱)자로 되어 있다.
백리[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一)1 87 페이지 / 전적]
「百里才」- 蜀漢 劉備가 龎統을 耒陽縣令으로 삼으니 諸葛亮은 말하기를 「龎士元은 百里고을을 다스릴 그런 재주가 아니라」하였음. 三國志에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