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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한양교(漢陽橋)[한흥가라 16 페이지 / 전적]
미상.
한양교(漢陽橋)[한흥가라 16 페이지 / 전적]
미상.
한양교(漢陽橋)[한흥가라 16 페이지 / 전적]
미상.
한양사적(漢陽史蹟)[한양가권지해라(한양가권지라) 23 페이지 / 전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서울의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
한양주산(漢陽主山)[비틀노래 4 페이지 / 두루마리]
조선의 수도 한양의 중심이 되는 산.
한업이[죄령열친가라(령열친가라) 27 페이지 / 전적]
한없이. 문맥상으로는 ‘한없음’이 되어야 한다.
한옆[사친가2(思親歌(二)) 11 페이지 / 전적]
한쪽 옆.
한온(韓蘊)[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10 페이지 / 전적]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1555년 장흥부사로 있을 때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라도병마절도사 원적 등과 함께 달량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한우(汗牛)[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五)5 191 페이지 / 전적]
「汗牛」-汗牛充棟의 略稱인데 書籍의 많음을 이름。柳宗元文에 「其爲書 處則充棟字 出則汗牛馬」라 하였음。
한울님[교훈가 2 페이지 / 전적]
동학(천도교)에서의 하느님.
한월(寒月)[사친가1(思親歌(一)) 10 페이지 / 전적]
겨울의 달을 달리 이르는 말. 잔등(殘燈) : 깊은 밤의 다 꺼져가는 희미한 등불.
한월(寒月)[차운 18 페이지 / 전적]
추운 겨울의 달. 싸늘한 느낌의 달.
한위(漢魏)[옥셜화답 3 페이지 / 전적]
중국을 통일한 한(漢) 왕조와 후한말의 위, 촉(蜀), 오(吳) 삼국 중 하나인 위나라.
한유(閑裕)니[죄령열친가라(령열친가라) 16 페이지 / 전적]
한가하고 여유가 있으니.
한유(韓愈)[석촌별곡 4 페이지 / 전적]
중국 당나라의 문인. 여기서는 구양수의 잘못인 듯하다.
한유(韓愈)[아림가(娥林歌) 8 페이지 / 전적]
중국 당나라의 문인ㆍ정치가(768~824).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변려문을 비판하고 고문(古文)을 주장하였다. 시문집에 '창려선생집' 따위가 있다.
한유(韓柳)[석천집(石川集二-五)2-5 149 페이지 / 전적]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을 말함.
한음[고봉선생문집 권일(高峰先生文集 券一) 135 페이지 / 전적]
송(宋) 나라 강하(江夏) 사람인 두감(杜淦)의 호임. 자칭 한음노인(漢陰老人)이라고 칭하고 사수(泗水) 부근에 은거하면서 농사를 지어 15년 만에 부자가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수모를 견디고 벼슬하는 자들은 대부분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은 수모를 견디고 나는 노력을 한다. 모두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지만 그에 비하면 내가 낫지 않은가.‘ 하였다
한음[백세보중(百世葆重 三)3 29 페이지 / 전적]
오성(이항복)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덕형을 이른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으며, 양사언 등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임란 때 북상하는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과 단독으로 만나러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이 평양에 있을 때 왜적이 이미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고 단독으로 현소(겐소)를 만나 그 침략을 꾸짖었다. 청원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지원을 얻었으며, 이여송의 접반사로서 줄곧 그와 함께 행동
한음(漢陰) 선생(先生)[한흥가라 75 페이지 / 전적]
이덕형(李德馨).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조선 중기의 문신. 호 한음. 남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요저서로 문집 《한음문고》가 있다. 1592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를 교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