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청 : (57339)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1 / 대표전화 : 061-380-3114
한국가사문학관: (57392)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가사문학로 877 / 대표전화 : 061-380-2700 팩스 : 061-380-3556
Copyright by Damyang-Gun. All Right Reserved.
홈 > 한국가사문학DB > 가사
용례풀이
김종연(金宗衍)[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70 페이지 / 전적]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고 제1차 쓰시마정벌을 단행한 무신으로 아버지가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모의하다 발각되어 살해당하자, 피신하였다가 신돈이 죽은 뒤 나와서 원수가 되어 왜구와의 싸움에 참가하였다. 이후 이방춘(李芳春) 등과 이성계(李成桂)를 죽일 모의를 꾀하였으나, 공모자인 윤구택(尹龜澤)의 밀고로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자, 붙잡혀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김좌근(金左根)[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8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의 문신(1797~1869).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헌종 4년(1838)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조순의 아들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인물이었으나 대원군의 집정으로 실각하였다.
김좌진(金佐鎭)[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68 페이지 / 전적]
독립운동가ㆍ장군(1889~1930).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3ㆍ1 운동 때에 만주에 들어가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어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고 병력을 양성하였다. 1920년에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뒤에 공산당원에게 저격당하였다.
김주신(金柱臣)[한양가권지해라(한양가권지라) 30 페이지 / 전적]
조선 숙종 때의 문신(1661∼1721). 인원왕후의 아버지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했음.
김지섭(金祉燮)[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69 페이지 / 전적]
독립운동가(1885~1928). 호는 추강(秋岡). 3ㆍ1 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4년에 일본 궁성(宮城)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복역 중 병사하였다.
김진양(金震陽)[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71 페이지 / 전적]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정몽주(鄭夢周)·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이확(李擴) 등과 더불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려는 이성계 세력과 대립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정(子靜), 호는 초려(草廬)이다.
김질(金礩)[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89 페이지 / 전적]
조선 전기의 문신(1422~1478)으로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이다.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동지를 배반하고 그 사실을 임금께 고함으로써 사육신 사건을 일으켰다. 그 뒤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김찬(金瓚)[백세보중(百世葆重 三)3 4 페이지 / 전적]
형조참의 안침의 아들로 호를 눌암이라 했다. 문장가 경제정책 전문가 등으로 이름이 났다. 임 때 선조의 피란을 반대했으며 그 뒤 개경에 임금의 일행이 도착하자 일본군 방어의 책임을 물어 동인의 영수 영의정 이산해를 파직시켰다. 체찰부사와 양호조도사 등으로 전쟁 동안 활약했고 접반사로서 명나라의 지원을 얻어냈다. 이덕형과 함께 강화회담에 참여하는 등 외교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고 전란의 수습에도 기여했다.
김창집(金昌集)[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1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의 문신(1648~1722).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숙종 10년(1648)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의정을 지냈다. 숙종 38년(1712)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경종의 왕세제로 영조를 책봉하게 하고,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하였다. 신임사화 때에 사사(賜死)되었다.
김처선(金處善)[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05 페이지 / 전적]
본관은 전의(全義). 세종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였다. 문종 때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단종 때 귀양이 풀리고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단종 3) 정변에 관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었다. 세조 때 다시 복직되어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다시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성종으로부터는 전어(傳語
김천일[백세보중(百世葆重 三)3 30 페이지 / 전적]
본은 언양이며 일재 이항의 문인으로 호는 건재 시호는 문열이다. 임란 때 서울이 함락되자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 기병할 것을 논의하고 고향인 나주에서 송제민, 양산숙, 박환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출병하였다. 공주에서 조헌과 호서지방 의병에 관하여 협의하고 북상하여 수원의 독산산성을 거점으로 본격적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 개가를 올렸다. 창의사라는 군호를 받고 의병과 함께 양화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명과 일본간에 강화가
김천일(金千鎰)[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18 페이지 / 전적]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1537~1593).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ㆍ경상ㆍ전라ㆍ충청 4도에서 활약하였으며, 진주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저서에 ≪건재집≫이 있다.
김천일(金千鎰)[백세보중(百世葆重 二-二)2-2 5 페이지 / 전적]
1537(중종 32)~1593(선조 26), 나주 출신의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수원성을 거쳐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방어에 힘써 정부로부터 창의사(倡義使)의 칭호를 받았다. 이듬해 왜군이 남으로 퇴각해 내려가자 이를 뒤 쫒아 가 진주성(晉州城)에 주둔하였다가 왜군의 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린 끝에 전사하였다
김천일(金千鎰)[한양가라 61 페이지 / 전적]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1537-1593)으로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경상·전라·충청 4도에서 활약하였으며, 진주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김첨지(金僉知) 첨지(僉知)[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26 페이지 / 전적]
김씨 성을 가진 어떤 나이든 사람을 낮추어 일컫는 말. 나이 많은 사람을 낮추어 일컫는 말.
김춘택(金春澤)[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0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문인(1670~1717).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김만중의 종손(從孫)으로,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구운몽>ㆍ<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저서에 ≪북헌집≫, 작품에 <별사미인곡>이 있다.
김충암[팔역가(八域歌) 35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 문인 김정
김취려(金就礪)[백세보중(百世葆重 三)3 23 페이지 / 전적]
문신으로 호는 정암
김취려(金就礪)[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57 페이지 / 전적]
고려 고종 때의 장군(?~1234)으로 조상의 공덕으로 벼슬자리에 올라 정위(正慰)에 임명된 뒤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대장군이 되었다. 고종 3년(1216)과 고종 5년(1218) 두 차례에 걸쳐 쳐들어온 거란병을 크게 무찌르고, 한순(韓恂)·다지(多知) 등의 반란을 평정하는 등 공로가 많아 판병부사에 이르렀다. 성미가 곧고 청백하며, 싸움에서는 기발한 계교를 많이 꾸몄다고 한다.
김치양(金致陽)[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51 페이지 / 전적]
고려 시대의 권신(權臣)(?~1009)으로 목종 때에 천추 태후의 총애를 얻어, 우복야 겸 삼사사를 지내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목종을 살해하려다가, 1009년에 강조(康兆)의 정변(政變)으로 현종이 즉위하자 처형되었다.